회원가입 | 로그인 | 1:1문의

고문 기술자들 > 자유게시판 & QnA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 호주소식 + 교민사회(퀸즈랜드) + 사고팔기 + 구인/구직 + 부동산 + Q&A/자유게시판 + 여행/유학 + 포토갤러리 + 전문가칼럼 + 비지니스 + 업소록 + 쿠폰할인 이벤트 + 공지사항

자유게시판 & QnA 목록

고문 기술자들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한겨레 (123.♡.27.124) 작성일2012-01-06 13:26 조회201회 댓글0건

본문

한국현대사에서 '고문'을 거론하면 연상되는 인물이 셋 있습니다. 일제 치하와 해방 공간에서는 노덕

술, 5공 시절에는 이근안, 6공 시절에는 정형근 전 의원 등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들로부터 고문을 당

한 피해자들에게는 마치 저승사자와 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중 누구 하나 자신의 고문행각에 대해 제대로 된 사죄나 참회를 한 적도 없고, 특히 노덕술

과 정형근은 응당한 죗값을 치르지도 않았습니다. 역사는 이들을 '고문기술자'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들 3인의 행적은 우리 현대사의 '고문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또 부상자(?) 치료를 핑계로 이들 곁에서

고문을 묵인, 협력한 '불의한 의사'들의 반인륜적인 행위 또한 묵과해선 안 될 것입니다.


[노덕술] 곤봉 휘둘러 피의자 숨지게... 보석 석방 후 무죄 선고

▲ '고문왕' 노덕술

1948년 7월 26일, 정부수립을 20여 일 남겨둔 시점에서 대형 고문사건이 터져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

다. 세칭 '수도청 고문치사사건'이 그것인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그해 1월 24일 발생한

장택상 수도경찰청장 저격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은 함북 무산 출신의 박성근을 혐의자로 체포하여 중부

경찰서에서 취조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수도청 수사과장으로 있던 노덕술이 취조실로 찾아와 박성근에게 곤봉을 휘두르며 자백

을 강요하였는데 박성근이 고문 끝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당황한 노덕술은 박성근의 시신을 한강에

버리라고 지시한 후 수도청 부청장 김태일의 도움을 받아 급히 몸을 숨겼습니다.

도망을 다니던 노덕술이 붙잡힌 것은 이듬해(1949년) 1월 25일 새벽이었습니다. 그해 1월 8일 친일

기업인 박흥식 검거를 시작으로 활동을 개시한 반민특위가 그를 서울 시내에서 검거한 것입니다

검거 당시 노덕술은 무기를 소지한 채 경찰관 4명의 호위를 받고 있어 또 다시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노덕술은 도피 중에도 권력층의 비호를 받고 있었는데, 그가 구속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특위에

노덕술을 풀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지지부진한 재판 끝에 노덕술은 7월 23일 만성기관지염

등 다섯 가지 병명을 이유로 공탁금 10만 원을 걸고 병보석으로 풀려났습니다. 결국 이 사건은 무죄가

선고되었으며, 이후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1899년 경남 울산 장생포에서 태어난 노덕술(창씨명 松浦 鴻)은 1920년 순사교습소를 마치고 그해

경남 경찰부 보안과 순사로 경찰에 입문하였습니다. 일제 당시 그는 경남지역 여러 경찰서의 보안과,

고등계, 사법계 등에 근무하면서 주로 사상범, 즉 항일투쟁가들을 다뤘습니다. 말하자면 독립운동가 때

려잡은 일제 앞잡이인 셈입니다.

동래경찰서에 재직 중이던 1928년 10월 동래청년동맹 집행위원장 및 신간회 동래지회 간부 박일형

을 체포하여 고문했으며, 그해 겨울에는 반일단체 '혁조회' 관련자 김규직, 유진흥 등을 체포해 고문했

는데 김규직은 고문 후유증으로 1929년 말 옥사했습니다. 이밖에도 그는 동래·통영경찰서 사법주임

시절 수차례 반일단체 탄압에 나섰으며, 일제 말기 평남 보안과장 시절에는 전쟁협력도 마다하지 않았

습니다.

[이근안] '얼굴 없는 고문기술자'... 김근태 전 의원에 의해 세상에 공개

▲ 1999년 구속 수감 당시 '고문기술자' 이근안 전 경감의 모습

"남영동에서 20여 일간 고문을 당하는 동안 '그'는 항상 핏발 선 눈빛이었고, 90kg이 넘어 보이는 거

구로 칠성판 위에 묶고는 깔고 앉아 목을 조르고 물고문, 전기고문, 발바닥 구타 등을 쉼 없이 했다."

전노련 사건 고문피해자 박문식씨 증언(<한겨레> 1988. 12. 21.)

"시멘트 바닥에 3시간 가량 무릎을 꿇려 놓았다가 자신의 무릎으로 허벅지를 찍어 그 자리에서 정신

을 잃은 일도 있었다. '그'는 항상 눈에 핏발이 서 있었으며, 칠성판을 자신이 발명했다고 자랑하기도

했었다." - 김태홍 전 한국기자협회 회장 증언(<동아일보> 1988. 12. 22.)

'그'로부터 고문을 당한 피해자들은 한결같이 '그'의 눈엔 핏발이 서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90k

g이 넘는 거구에 칠성판을 발명한 고문의 대가 '그'. '그'는 이 별명 외에도 '성명불상자', '반달곰', '고문

기술자' 등으로도 불렸는데 그가 바로 5공 시절 고문왕 이근안 전 경감입니다.

이근안은 치안본부(경찰청 전신) 남영동 대공분실에 근무하면서 각종 시국사범들의 고문수사를 지휘

해온 장본인입니다. 이근안은 "민주화가 되면 너희들이 나를 고문해라"고 말했을 정도로 파렴치할 뿐

더러 목사가 된 지금 다시 '공안목사'라는 딱지를 달고 있습니다. 고문경찰관의 대명사로 불리는 그의

인생역정을 한번 더듬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근안은 공군 헌병 출신으로 1970년 순경으로 경찰에 입문했습니다. 1972년부터 대공(對共) 분야

에 근무하게 된 그는 매번 특진으로 승진을 거듭해 1984년 경감에 올랐습니다. 고문혐의를 받고 잠적

할 때까지 그는 근무기간 대부분을 대공분야에 몸담은 이른바 '공안통'이었는데, 재직기간 중 모두 16

차례의 표창을 받은 바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간첩검거 유공이 4회, 1979년 청룡봉사상(조선일보사 시상), 1981년 내무부장관 표

창, 1982년 '국가안보 기여'로 9사단장 표창, 1986년엔 대통령으로부터 옥조근정훈장을 받기도 했습

니다. 그가 받은 표창의 이면에는 무수한 고문 피해자들의 피울음과 절규가 서려 있는 셈이라고 하겠습니다.

한동안 '얼굴 없는 고문기술자'로 불리던 이근안은 그가 고문했던 고 김근태 전 의원에 의해 세상에 알

려졌습니다. 1988년 6월 30일 특별가석방으로 풀려난 김 전 의원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6

차례에 걸쳐 자신을 고문한 '이름 모를 전기고문 기술자'가 이근안임을 밝혀냈습니다. 김 전 의원은 이

재오(서울민중연합의장, 현 한나라당 의원), 이선근(전노련 사건 관련자), 박문식씨 등 3인을 통해 사

진 속의 인물이 자신들을 고문한 이근안임을 확인한 것입니다.

김 전 의원의 제보를 받은 문학진 <한겨레> 기자(현 민주당 의원)의 끈질긴 추적 끝에 <한겨레>의 특

종보도(1988. 12. 21.)를 통해 비로소 이근안의 얼굴이 세상에 공개됐습니다. 그의 신상이 확인되자

고문피해자들은 그를 불법체포 및 고문 혐의로 정식 고발하였고 그는 마침내 수배되었습니다.

세상에 얼굴이 알려지자 이근안은 곧바로 잠적하였습니다. 그러나 검경은 그를 체포하는 데 미온적이

었습니다. 경찰은 검거 노력은커녕 오히려 그가 은신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당시 치안본부 5차장

이던 박처원 치안감과 동료 경찰관들은 조직적으로 그를 비호하였습니다. 특히 박처원은 도피 중인 이

근안에게 1500만 원을 생활비 조로 지급하였으며, 수배 중인 그가 퇴직금까지 받아가도록 도와주었습니다.
1992년 가을 당시 김수현 전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반장은 이근안의 집으로 찾아가 숨어 있던 그를 만

나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집 벽장에서 숨어 지내던 이근안은 1999년 10월 28일 수원지검 성남지청

에 자수하였고, 1999년 11월에 구속 기소되었습니다. 2000년 9월 대법원에서 징역 7년, 자격정지 7

년이 확정되었는데, 그가 저지른 악행에 비하면 비교적 가벼운 것이랄 수 있습니다.

2006년 징역 7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그는 돌연 성직자로 변신하였습니다. 도피 시절 기독교에

귀의했다는 그는 옥중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개혁측 총회신학교 통신신학부 4년 과정을 이수한

후 2008년 10월 30일 서울 종로구 연지동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관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다음 '아고라'에서 그의 목사 안수 취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사소개 | 개인정보취급방침 | 서비스이용약관 | 광고문의 & 제휴문의
Tel 0449 887 944, 070 7017 2667, Email qldvision@gmail.com
Copyright ⓒ DIOPTEC, Queensland Korean Community website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