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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편지 | 위대한 산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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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suseonjae 작성일2014-11-14 08:17 조회1,21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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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산악인



2007년 6월 7일

[도올인터뷰] 히말라야 16좌 세계 첫 완등 `진정한 영웅` 엄홍길

[중앙일보] `죽을 고비 수천 번 … 꿈•열정으로 이겨냈죠.`

마지막 300m가 3000m보다 긴 느낌 정상에 섰을 땐 모든 걸 잊었어요.

그 위험한 산에는 왜 가냐고요 ?





아마 지금 우리 사회에는 너무도 한가한 언설들이 난무하고 있다.

국정의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의 언설도 너무 한가하다.

너무 제멋대로인 것이다. 한가하기 때문에 제멋대로일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의 가슴에 보편적 감동을 전할 수 있는 순결한 지고의 목표를 향해

매순간 생사의 기로가 결정되는 치열함, 그 열정과 진실이 실종되어 있는 것이다.

아무리 그 열정과 진실을 위장하려 해도 그러한 위장이 통할 수 없는 삶의 긴박감과 필연성,

그 극적인 사례를 나는 엄홍길의 로체샤르 등정에서 본다.

히말라야에는 8000m 이상의 봉우리가 14좌 있다.

이 14좌를 완등한 사람이 세계적으로 열두 사람 있는데,

그 명단 중 세 사람이나 한국인이 차지하고 있다.

일본인도 끼여 있지 않은데.

우연적일지는 모르지만 이러한 사실은 퍽 충격적이다.

히말라야 14좌 완등의 도전은 고구려 기질을 이어받은 진취적 기상과 모험정신,

신라인의 전략성과 지구력, 백제인의 섬세한 감각 그 모두를 합친 한국인의 품성과 기질을 잘 나타내 준다.

나는 평소 이창호의 바둑과 엄홍길의 등정을 어김없는 우리 민족 저력의 발로로서 우러러보았다.



그런데 알피니스트들 사이에서는 진정한 히말라야 완등은 16좌가 되어야 한다는 전설이 있어 왔다.

위성봉이지만 얄룽캉(8505m)과 로체샤르(8400m)가 주봉으로서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어느 누구도 16좌의 전설을 달성치 못했다.

그런데 엄홍길은 이 전설에 도전장을 냈다.

2000년 K2에 올라 14좌 완등을 달성한 그는 2004년 5월 5일 얄룽캉을 오르는 데 성공했다.

최후의 도전은 로체샤르!

로체샤르는 로체 옆에 있는 봉우리지만

평균 70도가 넘는 각도로 깎아지른 빙벽이 3000m나 뻗어 있는 거대 직벽이다.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기에 충분한 히말라야 난공불락의 최난등 코스로서

그 외연(巍然)한 자태를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엄홍길의 도전은 번번이 실패했다.

두 번째 도전 때는 베테랑 산우(山友) 황선덕, 박주훈을 불귀의 객으로 보냈다.

정상을 불과 150m 눈앞에 두고 아차 하는 순간에

디디고 있던 빙판이 떨어져 나가는 판상눈사태가 벌어졌다.

밧줄이 스르르 그의 장갑을 태우면서 빠져나가 버렸다.

만약 밧줄이 그의 몸에 묶여 있는 상태였다면

그 순간에 같이 영원한 나락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2006년 3월 16일 세 번째 도전을 위하여 출발했다.

70일의 사투 끝에 8200m 지점까지 올랐으나

마지막 순간에 그는 로체샤르의 신이 자기를 받아주지 않는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는 겸허하게 퇴각했다.

정상 정복보다도 더 어려운 결정이었다.





2007년 3월 19일 서울을 출발한 4차 등반을 앞두고,

엄홍길은 나 도올을 데리고 가고 싶어 했다.

나는 일본 중앙알프스에서도 그에게 등반훈련을 받았다.

나의 모험심도 그칠 줄 몰랐다.

사실 중앙일보에 기자로 입사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를 따라 최소한 베이스캠프까지는 올라가 있었을 것이다.





그는 4월 중순까지 나에게 전 대원의 사인이 든 엽서를 보내왔다.

지난달 31일 그가 드디어 로체샤르를 등정했다는 사실을 접했을 때 나는 눈물이 쏟아졌다.

누구보다도 그의 삶의 갈망을 이해하고 있었고,

그 수없는 절망의 순간들을 상상하고 있었기에.

3일 오후 4시50분 나는 편집국에서 베이스캠프(5220m) 철수를 앞둔 엄 대장과 긴 통화를 시작했다.

그의 첫마디는 "아이쿠 선생님! 기적입니다! 기적!" 그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울먹이는 듯했다.



-우선 대체적 상황을 좀 설명해주오.



"기상조건이 최악이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설상가상 몬순 시즌이 닥쳤습니다.

모든 팀들이 다 철수하는 판인데도 저는 집요하게 버티었지요.

요번만은 로체샤르의 신(神)이 저를 받아 주리라는 묘한 믿음이 있었어요.

에베레스트 쪽으로는 폭설이 쏟아지는데 로체 쪽으로 갑자기 날씨가 개기 시작했어요.

기적이었죠.

이 마지막 일주일간 천지신명의 도움으로 저는 히말라야 등정의 마지막 소원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정상에 올랐을 때 그 순간의 느낌을 말해주오.



"정상 오름이 최후적 목적임에는 분명하지만

요즈음은 맹목적 등정(登頂)이 아닌 등로(登路)의 과정이 더 중요합니다.

캠프 4(8100m)에서 정상까지 고도 300m라지만,

실제적 루트는 3000m보다 더 긴 느낌이죠.

더구나 그 3분의 2가 인간의 발자취가 한 번도 스친 적이 없는 초등(初登)코스예요.

그러니 그 위험은 예측을 불허해요.

대원 4명이서 겨우 산소 한 통! 물 반 리터! 보통 최후에 산소 두 통은 가지고 떠나는데

위험상황 때문에 무게를 줄이기 위한 겁니다.

그 갈증과 호흡곤란, 기아, 탈진, 영하 40도의 추위에 당하는 동상,

13시간의 사투 끝에 도달했을 때

와아~ 뭐라 말씀드리면…."



-그 순간의 느낌을 좀 말해 달래 두.



"아이쿠 선생님,

인간이 극도의 상태에 이르게 되면 모든 것을 잊어버립니다.

아니 모든 것을 잃어버려요.

내 손발의 동작조차 느껴지지 않는 무아(無我)의 상태로 들어갑니다.

인간의 언어로 전할 수 있는 '느낌'이 없어집니다.

지원사들의 깃발을 들고 사진 한 장 찍을 여력이 없었습니다.

등정의 기쁨과도 같은 감정의 노출조차 사치가 됩니다.

오직 어떻게 내려갈까 하는 일념뿐이었죠."



-그래서….



"그 순간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어요.

폭설이 개고 순간 티베트, 네팔 쪽으로 사통팔달 환하게 시야가 트이더라고요.

그런데 때는 이미 오후 6시 반!

미션 임파서블의 시간이었죠.

등정은 보통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 통례입니다.

오후 6시 반 등정은 있을 수 없는 얘기예요.

달밤에 70도 빙벽을 착지(着地)된 아무런 근거도 없이 하산해야 하니까요.

아이젠을 더듬거리며. 그런데 설상가상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죠.

대원 변성호가 설맹에 걸린 겁니다."



설맹(雪盲)이란 만년설의 반사광을 너무 쏘여

순간적으로 망막 파괴가 일어나 시력을 상실하는 병인데

시각장애인과 같이 앞을 못 본다.

2005년 초모랑마 휴먼원정대를 결성케 만든 그 주인공 박무택도

바로 설맹으로 최후의 동반자였던 장민을 먼저 하산시키고 불귀의 객이 되었던 것이다.

엄홍길은 칸첸중가(8586m) 등반 때 박무택과

비부아크(Bivouac.아무 장비 없이 정상 부근에서 웅크리고 밤을 지새움) 했던 기억도 있다.

요번에 변성호까지 박무택의 비극을 맞게 할 수는 없었다.



"200m짜리 밧줄에 의지하면서 제가 앞장서고 그 바로 뒤에 성호,

그 뒤에 상현, 그 뒤에 셰르파, 타이트하게 움직이면서 앞 못 보는 성호를 인도해 갔습니다.

총 25시간의 사투!

저는 정말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발자국에서 생사가 갈라지는 빙벽, 암벽, 암 빙벽의 준험한 직벽에서

한 단락 끝나면 소리치고 또 소리치고, 죽을 고비는 수천 번 있었던 것 같습니다.

베이스에서 무전신호가 왔지만 장갑 벗고 마스크 벗고 전화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죽음을 의미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 절박한 상황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엄홍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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